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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ly 23, 2020

‘서울의 유령’ 노량진 상인들의 기록…“고통은 현재진행형, 부정말고 기억했으면”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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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름 둘레 목재 탁자 위에 흰 정사각형 판넬이 놓였다. 판넬에는 400여개 검은 못이 1㎝ 남짓 좁은 간격으로 촘촘히 박혔다. 못과 못 사이 좁은 공간엔 글자가 하나씩 궁서체로 적혔다. 글자들은 가로·세로로 모여 ‘충남냉동’ ‘군산항’ ‘영도’ ‘동해’ ‘청해진’ 같은 단어를 이뤘다. “단어들은 사라진 상점들의 이름이에요. 노량진 구 수산시장이 철거되면서 많은 상점이 사라졌잖아요. 무질서하게 놓인 글자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위·아래·옆의 글자와 연결돼 상점의 이름을 발견하게 돼요.”

23일 서울 마포구 아현동 ‘복합문화공간 행화탕’에서 박산들 작가가 말했다. 지하철 5호선 애오개역 1번출구에서 도보 2분 거리인 이곳엔 지난 17일부터 <노량진 : 터, 도시, 사람> 전시가 차려졌다. 박 작가 포함 ‘구 노량진수산시장 예술해방전선’ 소속 예술가들이 저마다 그림과 사진을 보내 전시를 구성했다.

‘구 노량진수산시장 예술해방전선’이 서울 마포구 아현동 ‘복합문화공간 행화탕’에서 개최한 전시 <노량진 : 터, 도시, 사람>의 전시물에 23일 고무줄이 걸려 ‘역사’ 등 글자를 이루고 있다. 조문희 기자

‘구 노량진수산시장 예술해방전선’이 서울 마포구 아현동 ‘복합문화공간 행화탕’에서 개최한 전시 <노량진 : 터, 도시, 사람>의 전시물에 23일 고무줄이 걸려 ‘역사’ 등 글자를 이루고 있다. 조문희 기자

전시는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이 5년여간 겪은 괴로움을 계기로 기획됐다. 지난 2016년 시장 부지를 소유한 수협이 ‘현대화’를 명목으로 새 시장을 열고 옛 시장 철거에 나서면서 고통이 시작됐다. 2017년 4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총 10차례 집행이 이뤄졌다. 새 시장 입주를 거부한 채 옛 시장에서 쫓겨난 상인 80여명은 노량진역 인근 도보육교 위에 텐트를 설치하고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 안의 유령’이죠. 철거 때마다 사람이 다치는데 시민들은 물론 언론도 관심이 없습니다.” 황경하 작가가 전시장 벽면에 걸린 그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 작가는 수산시장 명도집행이 끝난 이후인 지난해 10월쯤 마음 맞는 작가들과 상인들에 연대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예술해방전선을 꾸리고 매주 금요일 저녁 상인들이 숙박하는 노량진역 인근을 찾아 문화제를 열었다. 당초 8명으로 시작했던 모임은 현재 40명 가까운 규모로 커졌다.

문화제를 넘어 전시회를 기획한 건 동작구청·서울시의 계속되는 철거 시도 때문이었다. “상인분들 주무시는 육교 주변에 스티로폼이 많아요. 겨울을 온열기구도 못켠 채 보냈어요. 이대로면 사람 하나 죽겠다 싶더군요. 뭔가 해야겠다 싶었어요. 대부분 70대 이상으로 나이도 많으신데, 문제가 해결되긴 커녕 철거만 계속 들어오니까….”

그의 시선이 닿은 벽면엔 성인 남성 키보다 훨씬 큰 천 캔버스가 세로로 걸렸다. 캔버스에는 고양이, 생선, 장화, 국자 등을 움켜쥔 포크레인과 빼곡히 늘어선 경찰의 모습이 담겼다. 지난 2월21일 노량진역 인근 노점 철거 당시 현장을 보고 이난영 작가가 그린 그림이다. 당시 현장에선 부상자 4명이 발생했고 상인 2명이 병원으로 후송됐다. 지난 6월16일엔 시장의 마지막 농성장도 철거됐다.

‘구 노량진수산시장 예술해방전선’이 주최한 전시 <노량진 : 터, 도시, 사람>이 23일 서울 마포구 아현동 ‘복합문화공간 행화탕’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공간 중앙에 설치된 마이크 너머 벽면에 지난 2월 노량진역 인근에서 발생한 철거를 형상화한 그림이 걸려 있다. 조해람 기자

‘구 노량진수산시장 예술해방전선’이 주최한 전시 <노량진 : 터, 도시, 사람>이 23일 서울 마포구 아현동 ‘복합문화공간 행화탕’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공간 중앙에 설치된 마이크 너머 벽면에 지난 2월 노량진역 인근에서 발생한 철거를 형상화한 그림이 걸려 있다. 조해람 기자

전시는 철거 현장을 묘사한 그림뿐 아니라 상인들의 손, 농성장의 표정을 담은 사진과 다큐멘터리도 담았다. 밀려난 삶은 동시에 ‘밀려나기 싫은’ 마음과 기억이기도 했다. 황 작가는 “사진을 잘 보시면, 상인분 손가락이 다 휘어 있다. 숟가락으로 평생 조개를 까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며 “상인들은 한국 최고의 수산시장에서 평생 일하며 삶을 영위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철거로) 일터를 잃은 게 아니라 삶을 부정당한 느낌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는 국가가 나서 상인들이 겪은 폭력과 모멸을 사과하고, 상인들이 장사할 터전 마련에 고민을 더해야 한다고 했다.

박 작가는 말했다. “상인분들의 상황이 기억됐으면 해요. 당장 제 친구들도 모르거든요. 서울 한복판에서 지금도 용역이 사람을 때리는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요.” 전시는 오는 25일 마무리된다. 예술가들은 이후 작품들을 노량진역으로 가져가 전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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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3, 2020 at 01:08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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